探索,發現,愛好、學習,記錄,分享。
學海無涯,天涯若比鄰,三人行,必有我師。

종로 [Jong-ro, 鍾路] Seoul, 1880

10007369_696169063760313_1031433437_o.jpg

photo 헨리 게하르트 아펜젤러(H.G. Appenzeller) 목사

1876년 개항 후 종로, 흥인지문에서 촬영 

운종가 중심부가 기와집이 많은 반면 초가집이 많이 보인다. 흥인지문 바깥(왕십리일대)에는 채소밭이 많았다. 도성안으로 공급된 채소와 과일이 주변 시장을 형성하였다.

북촌과 남촌에서 민족에 의한 2분 구조로

“서울의 대로에 종각 이북 지역을 북촌이라 부르는데 노론이 살았으며, 남쪽 지역을 남촌이라 부르는데 소론이하 삼색당파가 섞여 살고 있었다.”
라고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남촌과 북촌이란 말은 조선시대부터 종로를 기준으로 그 남북을 나누어 지칭하는 말로 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양궁 사이의 고급주택지로서 큰 기와집이 빽빽이 들어선 동네였고, 남촌은 박지원의 허생전의 주인공허생의 비바람도 다 막지 못할 정도의 초라한 초가집과 비만 오면 길에 발이 푹푹 빠지기 일 수인 진고개를 떠올리게 하는 서민적인 동네였다. 그러던 것이 일제강점기로 들어가며 상황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이 남촌에 집거하기 시작한 것이다.

1880년 서대문밖 청수관(淸水館)에 일본 공사관을 개설하고 공사 외 총 40여명의 일본인들이 기거하기시작했다. 일본 민간인들이 최초로 서울에 들어온 것은 경운동 박영효의 집을 구입하여 일본 공사관을 신축하면서 인부 70여명이 들어온 것이 최초였다. 

1885년 2월부터는 일본인 민간인들도 입경, 정주가 허용되어 당시 경운동 공사관에서 다시 옮겨온 일본 공사관에 인근한 지금의 중구 예장동, 주자동에서 충무로 1가에 이르는 남산아래 진고개일대를 일본인거류구역으로 정했다. 

이후 남산아래 남촌일대에 일본인들의 집거가 시작되었다. 같은 해 9월 일본 거류민들의 수는 20호 약90여명에 불과 했고 그 때 처음으로 12동의 일본식 일본인 가옥들이 명동성당 후문 앞 일대에 세워졌다.

청일전쟁 후 일인들의 수는 급격히 증가해 1884년 말 260호 848명이던 것이 1895년 말에는 배로 늘어 500호 1,889명에 달했다. 1906년에는 만명을 넘어섰고 한일합방 당시인 1910년에는 38,397인으로 늘어나 있었다. 당시 외국인을 제외한 서울의 인구가 238,499인이었며 외국인을 포함한 총인구는 278,958명이었으므로 서울인구의 약 14%를 차지할 만큼 증가해있었다.

1920년에는 조선인 181,829인 일본인 65,617인이었고 1933년에는 조선인 270,590인 일본인 106,782인으로 조선인 3명에 일본인 1명의 비율로 인본인의 수는 늘어나 있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일본인들이 월등히 우월했으므로 실제 서울은 일본인들의 도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 중심은 남산아래의 옛 남촌일대였다.

남산아래 옛 남촌일대는 임진왜란때부터 일본인들과 관계가 깊은 곳이었다. 지금의 예장동 일대는 임진왜란때 때 왜장 증전장성(增田長盛)이 이 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하여 왜성대로 불리어진 곳이었다. 그리고 1911년에 개설된 황금정 도로는 일본인 거주지를 청계천변까지 확장시키면서 본정통과 함께 일본인 거주지의 중심가로로 성장했다.

일제강점기의 한글 신문, 잡지들을 보면 남촌과 북촌이란 말이 자주 등장한다. 한 예로 『개벽(開闢)』에 ‘형제여 남촌의 시설은 저러하거늘 북촌의 시설은 왜 이 모양입니까’,‘남촌의 일인촌’,‘남촌시가의 극성, 몰락된 북촌의 참상’등의 표현이 등장한다. 

반면 일본글의 신문, 잡지에서는 남촌이니 북촌이니 하는 말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일제강점기의 ‘남촌’, ‘북촌’은 조선인들이 조선인과 일본인을 거주지로 분리하여 지칭한 말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를 통해 몰락해가는 조선인사회와 극단의 대비로 번창해가는 일본인사회를 꼭 집어 식민통치하의 비애와 자기비하 의식까지 담아 표현한 말이었다. 

실제 인구비교를 통해 거주상태를 살펴보더라도 남촌 일대는 일인득세지역이었고 청계천에서 을지로 사이가 그 경계로서 남부는 일인, 북부는 조선인득세지역이었으며 청계천 이북 지역은 조선인이 절대적으로 우세한 지역이었으며, 특히 종로통 이북은 거의 조선인 독거지나 다름이 없었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지속되면서 1910년대까지만 해도 균형을 이루던 북촌과 남촌의 경제력이 1920년대에 이르면서 현저한 차이를 드러내게 되었다. 일제 당국의 재정지출은 일본인 거류지에 편중되었으며, 일인 상인들은 식민지 지배자로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급속히 성장하였고, 이는 도시공간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경성부내 주요 공공건물 중 북촌에 위치한 것은 조선총독부 하나에 불과했으며, 그 밖의 모든 주요 건축물은 남촌에 위치하고 있었다. 조선인의 북촌, 일본인의 남촌이라는 구분과 함께 퇴락하는 북촌, 번창하는 남촌으로 구분되게 되었다. 조선시대 이래의 남촌과 북촌의 구분은 이제 조선인과 일본인의 민족에 따른 이원화된 공간구조로 재편되었고 있었다.

版權聲明:本文采用知識共享 署名4.0國際許可協議 [BY-NC-SA] 進行授權
轉載事宜:如需轉載需徵得應允,轉載必須注明來源於本站的信息。
文章名称:《종로 [Jong-ro, 鍾路] Seoul, 1880》
文章链接:https://www.thefreesky.com/blog/7807.html
本站資源僅供個人學習交流,請於下載後24小時內刪除,不允許用於商業用途,否則法律問題自行承擔。

評論 抢沙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