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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李秉喆, 1910.2.12 ~ 198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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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그룹의 모체인 삼성상회를 설립하고 삼성물산을 세워 무역업을 하면서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중앙일보》 창설

호 호암(湖巖). 경상남도 의령(宜寧) 출생.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호암(湖巖). 경상남도 의령 출생. 아버지 찬우(纘雨)와 어머니 권재림(權在林)의 2남 2녀 중 막내이다.

이병철은 1910년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中橋里) 723의 장내마을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진주군의 대지주 이홍석(李洪錫)이다. 아버지는 이찬우(李纘雨, 1884∼1957)이며 어머니 안동 권씨 권재림(權在林)이다.

그의 조상 중 한 사람이 1600년대에 벼슬을 버리고 진주군 중교리로 낙향하여 이곳에 정착하여 대대손손 세거지지로 삼음으로써 진주 지역에 그 뿌리를 내렸다. 시골로 낙향하여 향반으로 몰락했지만 할아버지 이홍석(李洪錫)의 때에 1천석의 벼를 생산하던 대농토를 가진 지주로 성장했고, 아버지 이찬우 역시 1천석지기의 농토를 소유한 천석꾼의 지주이자 부농이었다. 이병철의 집안은 대대로 의령군 중교리와 진주 지역 일대의 대지주였다.

아버지 이찬우는 지역의 지주로 만족하지 않고 시골에서 큰 농사를 지으면서도 한양을 오고가며 독립협회와 기독교청년회에도 참여하였으며, 아버지 이찬우는 한성부에서 장래가 촉망되던 청년 이승만을 만나 서로 교류하기도 했다.

어려서 할아버지 문산 이홍석이 세운 서당인 문산정(文山亭)에서 천자문, 사서삼경, 논어(論語) 등을 배웠다. 1919년 3월 한학 수학을 인정받아 진주군 지수면의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1920년 지수보통학교 4학년 당시 어머니 권재림의 친정이 있는 경성부 종로방 가회동의 수송보통학교로 전학해갔다. 수송보통학교를 다니는 동안 심한 경상도 사투리 때문에 서울 학생들과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경성 생활에 적응, 중동중학의 속성과에 진학한 후에는 학습진도가 올라 우수한 성적을 거두게 된다. 1927년 고향에서 보낸 편지를 받고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후손인 순천 박씨 박기동의 넷째 딸 박두을과 정혼, 1928년 고향에서 혼례를 올린다.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전문부 정경학과에 입학하여 수학중 심한 각기병으로 귀국하게 되어 학업을 중단했다.

중동중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 1930년 4월 와세다 대학 전문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와세다 대학 유학 초기 한동안 책벌레가 되었다. 그러다가 틈만 나면 곳곳의 공장을 방문해서 일본 공업의 실상을 자주 살펴보았다고 한다. 와세다 대학 재학 때부터 그는 기업가의 꿈을 꾸게 되었다. 와세다 대학 정경과를 1934년 중퇴하였고, 1982년 미국 보스턴 대학에서 명예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학시절 이병철의 생활은 풍족한 편이었다. 고향집에서 매달 학비로 200원을 송금해왔는데, 당시 일본 중산층 가정의 한달 생활비가 50원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풍족한 편이었다.

유학시절 이병철은 공부에 열중하고 스스로 충실하게 생활했으나, 와세다 대학 1학년 재학 중 건강의 악화로 쉽게 지치고 조금만 책을 읽어도 쉽게 피로해지는 증상이 생겨 2학년 1학기에 휴학계를 내고 온천을 찾아다니며 병을 치료하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후일 회고에서 그는 ‘공부해서 무슨 벼슬을 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단지 도쿄의 신학문이 어떤 것인지 알았고 그 사람들의 생각도 알게 되었으니 유학생활을 더 하면 뭣하나 싶은 회의가 들었다’ 며 이병철은 2학년 되던 해 가을, 와세다 대학을 중퇴하고 돌연 가방 하나만 들고 귀국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휴양하면서 이병철의 건강은 회복되었다. 대학시절 자기 집안의 노예를 해방시켜주었던 톨스토이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던 이병철은 건강이 회복되자 제일 먼저 집안의 머슴들에게 전별금까지 주어 모두 해방시켜주었다. 그러나 그 뒤 고향에서 특별히 할일 없이 무위도식하던 이병철은 친구들과 골패노름에 빠졌다. 밤새 노름에 빠져 달 그림자를 밟으며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고 이병철 스스로 술회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밤새 노름을 하다 집으로 돌아와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세 아이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는 악몽에서 깨어난 듯한 충격을 받았다.

훗날 회고에 의하면 ‘그야말로 허송세월이었다. 어서 빨리 뜻을 세워야 한다.’는 회한과 두려움에 며칠 꼬박 새웠으며, 자신에게 맞는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사업을 하겠다고 결심을 굳힌 그는 며칠 후 아버지 이찬우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 이찬우는 별말 없이 아들에게 선선히 사업자금을 내주었다.

“마침 너의 몫으로 연수 300석의 재산을 나누어주려던 참이다. 스스로 납득이 가는 일이라면 결단을 내려보는 것도 좋다.”

그 말을 듣고 아버지와 상의, 이병철은 아버지 이찬우를 설득하여 그 때까지 이병철의 집에 살고 있던 다섯 가구의 종 문서와 집안의 역대 노비문서를 모두 불사르고, 노비들에게 돈을 주어 석방시켜 떠나게 했다. 그러나 일부 노비들은 떠나지 않고 일을 돌보았다. 그의 노비 석방은 조선시대의 잔재가 남은 사회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행동이었고, 이를 두고 친척들과 인근 사람들 중에는 비난과 찬사가 엇갈리기도 했다.

그는 장사를 할 곳으로 경성부부터 평양, 부산, 대구 등지를 직접 물색하여, 생각해 보았으나 고향 인근의 포근 항구 마산이 떠올랐다. 쌀을 생각한 그는 마산은 조선 각지에서 생산한 쌀을 수집하여 도정해서 일본으로 보내는 도정공장이 있는 것을 알아냈고, 도정공장은 수 백 가마니씩 도정을 기다리는 벼덤이들이 있었다. 바로 그는 친구 둘과 힘을 합해 동업(同業)으로 정미소를 차렸다.

1936년 고향 친구인 정현용(鄭鉉庸), 박정원(朴正源)과 동업으로 마산에서 도정공장과 협동 정미소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동차 회사도 하나 인수했다. 그 간에 그 회사에서 가지고 있던 헌 자동차 열 대에 새 자동차 열 대를 더 구입했다. 당시 자동차 한 대 값은 지금의 비행기 한 대 값과 같았다.

자동차 회사는 문제가 없었으나 정미소의 장사가 되지 않으면서 돈은 벌기는 커녕 본전을 까먹고 있었다. 같이 동업을 시작한 두 친구 중에 한 친구가 그만 두자고 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쌀 값이 내릴 때는 사고, 올라갈 때는 파는’ 방법에 착상한 후 다음 해부터 정미소에서도 큰 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동차 회사와 정미소의 일이 풀리면서 막대한 이익을 창출했고, 그 때의 이병철의 머리에 대농(大農)가 출신답게 땅을 생각했다. 이어 김해 평야에 나온 땅을 전부 사기로 작심, 돈은 번 돈과 은행 돈을 쓰면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3]

땅을 사놓고 은행과 정산을 하려할 때의 일이다. 은행에서 모자라는 돈을 가지고 오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돈이 남았다고 내주는 것이었다. 이상하다고 여겼으나 당시 땅을 사서 등기하고 정산하는 사이에 땅의 은행 감정가가 올라 융자 돈이 많아져 땅을 사고도 돈이 남았다. 이로써 청년 이병철은 갑자기 일약 200만평의 대지주의 일류 갑부가 되었다. 대구, 부산에 주택 부지도 사놓았다.

그는 정미소와 자동차 회사와 땅을 각각 맡길만한 사람들에게 맡겨놓고 밤 마다 놀러 다녔다. 마산에 몇 안되는 요정들이 모두 그의 단골들이었다. 그래서 낮에는 사업체에서 돈 버는 것을 구경 감독 지휘하고, 밤에는 춤 추고 노래하고 풍류를 즐기기도 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이 터져 조선과 일본의 각 은행은 융자를 중지하고, 이미 융자해 준 대금을 회수하고 있었다. 개인이 아무리 사업 수완이 좋고 운이 있다고 하더라도, ‘세월(歲月)이 돕지 않으면 재물(財物)은 지킬 수도 없고 늘릴 수도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중일전쟁의 여파로 이병철은 정미소 자동차 회사 김해 땅을 모두 팔아 은행 빚을 갚고 빈털터리가 됐다.

그 뒤 1938년 3월 3만 원의 자본금으로 대구로 올라가 대구 수동(현 인교동)에 ‘三星商會(삼성상회)’ 라는 간판을 내걸고 장사를 시작하였다. 1941년 주식회사로 개편, 청과류와 어물 등을 생산자로부터 공급받아 도매, 소매업과 수출 등도 하면서 중국에도 수출하기 시작하였다. 1942년 조선양조를 인수하여 함께 운영하던 중 광복 후 1947년 경성부로 상경하여 1948년 삼성물산공사(三星物産公司)를 창설, 무역업에 종사하였다.

1950년 초 일본공업시찰단원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어 출국, 일본 내 제조업, 수공업, 중공업, 경공업 등 일본의 공업계와 전후 공업시설 복구 현장을 직접 시찰하고 귀국했으나 그해 6월 서울에서 6.25 전쟁을 맞았다. 6·25 직후 피난갔다가 1951년 부산에서 다시 삼성물산(三星物産)을 세워 다시 무역업에 본격 뛰어들면서 1953년에는 제조업에도 투자하였다.

1953년 ~ 1954년 제일제당(현 CJ)과 제일모직을 설립, 제조업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제조업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면서 사업 영역을 확장해나갔다.

동방생명, 신세계백화점, 안국화재보험, 전주제지 등을 인수, 경영하였고, 성균관대학교의 재단 이사로도 교육사업에 투자하기도 했다. 이후 사업 영역을 크게 확대해갔으며 중앙개발, 고려병원 등을 인수하여 운영하기도 했다. 1961년부터 1987년까지 한국경제인협회(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 회장을 역임했다.

1964년초 한국비료를 인수 운영하였으며, 1964년 5월 동양라디오, 텔레비전 동양방송을 설립하여 방송에도 진출했고, 그 해 [[대구대학[영남대전신]]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1965년 9월 중앙일보를 창설하여 언론사에도 진출하였다. 그러나 중앙일보 등은 사돈인 홍진기 일가에게 넘겼다. 동양방송 등은 1980년 언론통폐합이 될 때까지 운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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