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조식 편지, 초상
1501년(연산군 7년) 경상좌도(慶尙左道) 예안현(지금의 경북 안동) 온계리에서 퇴계 이황이 태어나고, 경상우도(慶尙右道) 삼가현(지금의 경남 합천) 토동에서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년)이 태어났다.
16세기 학파 형성기에 영남학파의 두 거봉이 된 이들은 같은 해에 태어나서 퇴계는 70세, 남명은 72세까지 장수를 했다. 퇴계가 경상좌도 사림의 영수라면 남명은 경상우도 사림의 영수로서 이 두 사람의 제자들은 동인 정파를 형성했다. 그러나 영남학파를 바탕으로 한 이 동인 정파는 다시 퇴계학파의 남인과 남명학파의 북인으로 분립되었다.
조식(曺植, 1501년 6월 26일 ~ 1572년 2월 8일)은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이고 영남학파의 거두이다. 본관은 창녕,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어려서부터 학문 연구에 열중하여 천문, 역학, 지리, 그림, 의약, 군사 등에 두루 재주가 뛰어났다. 명종과 선조에게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제안받았으나 한번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제자를 기르는 데 힘썼다.
조식(曺植)의 자(字)는 건중(楗仲)이며, 경상도 삼가현 사람이다. 한미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와 숙부가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비로소 관료의 자제가 되어 사림파적 성향의 가학을 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30세까지 서울 집을 비롯한 부친의 임지에서 생활하며 세상을 보는 안목을 넓혔고, 후에 명사가 된 인물들과 교제하였다.
조선 중기의 큰 학자로 성장하여 이황과 더불어 당시의 경상좌·우도 혹은 오늘날의 경상남·북도 사림을 각각 영도하는 인물이 되었다. 유일(遺逸)로서 여러 차례 관직이 내려졌으나 한번도 취임하지 않았고, 현실과 실천을 중시하며 비판정신이 투철한 학풍을 수립하였다.
그의 제자들로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 정인홍, 김우옹, 정구 등 수백명의 문도를 길러냈으며, 대체로 북인 정파를 형성하였다. 사후 사간원대사간에 추증되었다가 북인 집권 후 1613년(광해군 7년) 의정부영의정에 증직됐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조식의 학문과 실천의 지표는 ‘경(敬)’과 ‘의(義)’였다. 경과 의는 [주역(周易)]에 나오는 말로 “군자는 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바깥을 바르게 한다.”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조식은 좌우명과도 같았던 경과 의를 실생활에도 옮겨, 몸에 차고 다니던 칼에 “안에서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에서 결단하는 것은 의다(內明者敬 外斷者義)”라는 글을 새겼다. 그에게 있어 ‘경’과 ‘의’가 가진 의미는 마치 하늘의 해와 달과 같은 것으로,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되는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모든 진리는 이 두 글자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이었다.
조식은 선비이면서도 칼을 차고 다녔는데, 칼에는 내명자경(內明者敬), 외단자의(外斷者義)라는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안에서 나를 깨우치는 것은 경이요, 밖에서 결단하는 것은 의다." 조식은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 이와 같은 글을 새긴 것이다.
조용한 방에 단정히 앉아 칼로 턱을 고이는가 하면 허리춤에 방울을 차고 스스로 행동을 조심하여 밤에도 정신을 흐트린 적이 없었다. 한가로이 지낸 세월이 오래되자 사욕과 잡념이 깨끗이 씻겨 천 길 높이 우뚝 선 기상이 있었고, 꼿꼿한 절개로 악을 미워하여 선량하지 않은 향인(鄕人)은 엄격하게 멀리했기 때문에 향인이 감히 접근하지 못했으며, 오직 학도들만이 종유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의 「졸기」에 있는 기록이다. 이는 서릿발 같은 선비의 기상을 잘 보여준다. 조식은 다른 선비들보다도 더욱 자신에게 엄격했다.
[단성소(丹城疏)] 을묘사직상소 - 1555년(명종 10) 11월, 경상도 단성현감(丹城縣監) 조식(1501~1572)이 올린 상소의 내용이다
"전하의 국사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하여 천의가 이미 떠나갔고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비유하자면 백 년 된 큰 나무에 벌레가 속을 갉아먹어 진액이 다 말랐는데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것과 같은 형국입니다. 조정에 충의로운 선비와 근면한 양신(良臣)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형세가 이미 극에 달하였으므로 사방을 돌아보아도 손을 쓸 곳이 없습니다. 소관(小官)은 아래에서 시시덕거리면서 주색이나 즐기고, 대관(大官)은 위에서 어물거리면서 오직 재물 불리는 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조식은 사직상소를 올려 신성불가침적인 존재인 국왕과 대비를 향해 "자전(慈殿)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궁중의 과부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의 외로운 후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천백 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해 내며 무엇으로 수습하시겠습니까?" 라는 상상도 못할 극언을 남겼다. 그는 국왕이 좋아하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냐고도 따져 물었다. 왕이 무엇을 좋아하느냐에 따라 나라의 존망이 달렸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상소문을 받아본 명종은 본질은 외면한 채 ‘고아’와 ‘과부’라는 표현에 격노하며 조식을 불경죄로 처벌하라고 명령했다. 이 일을 두고 [조선왕조실록] 사관은 “왕이 신하의 상소에 대해 답을 하지 않고 도리어 문책하는 것은 자유로운 언로를 막는 것”이라 했다.
또 “이 이후로 온 나라의 선비들은 임금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게 되어 모두 비위 맞추는 데로 몰리게 될 것이다”라며 애석해 했다. 재야 지식인으로서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조식은 이 상소로 인해 논란의 중심에 섰지만, 한편으로는 국왕도 무시할 수 없는 재야 사림의 영수로 우뚝 서게 되었다.
[남명과 퇴계]
한국 역사에서 16세기는 지방을 토대로 한 이른바 사림(士林)이라 불리는 지식인들이 성장한 시기다. 이들 세력들은 지방에 따라 학문적 차이도 드러내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곧 남명학파와 퇴계학파이다. 남명학파와 퇴계학파는 지리적으로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나뉘어져 있어 각각 영남우도와 영남좌도를 대표했다.
진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남명학파가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실천적인 학문을 주장했다면, 안동지역을 중심으로 한 퇴계학파는 현실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면서 성리학을 이론화했다. 조선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이 쓴 [성호사설]에는 이 두 학파의 차이점이 잘 지적되어 있다.
“중세 이후에는 퇴계가 소백산 밑에서 태어났고, 남명이 두류산(지리산) 동쪽에서 태어났다. 모두 경상도의 땅인데, 북도에서는 인(仁)을 숭상했고, 남도에서는 의(義)를 앞세웠다.”
이익은 지리산 아래에서 출생한 남명이야말로 우리 나라에서 기개와 절개로는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였다고 평가하면서, 그의 제자들이 여기에 영향을 받아 정의를 사랑하고 굽히지 않는 지조를 지녔다고 했다. 반면 퇴계의 제자들은 깊이가 있고 겸손하다고 했다.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은 나이가 동갑이었다. 1501년에 경상우도와 경상좌도를 대표하는 대학자가 두 명이나 태어난 것이다. 이황이 71세로, 조식이 72세로 세상을 떠났으니 둘은 완벽하게 동시대를 산 인물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서신만 왕래했을 뿐 실제로 대면한 적은 없었다.
조식은 퇴계학파의 성리학논쟁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는 퇴계학파가 현실 인식은 하지 않고 형이상학적인 이론 논쟁만 일삼고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이황은 조식이 유학 이론에 깊지 못하다고 평했다.
학문적으로는 이견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 호감을 가진 라이벌이었다. 경상도의 학자들 가운데는 두 사람을 모두 존경하여 두 문하를 번갈아 출입하며 학문을 계승한 인물들이 많았다. 정구·김우옹·정탁등이 대표적인 학자이다.
그러나 조식의 수제자라 할 수 있는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의 경우 이황을 비판한데다가 인조반정 때 역적으로 처형당하면서 조식의 명망이 퇴계에 비해 빛을 잃게 되었다.
훗날 정조(正祖)는 “영남에서 절의있는 선비가 배출된 것은 실로 조식의 힘 때문이니, 후세에 어찌 중도의 선비를 얻을 수 있겠는가. 이런 사람도 얻기가 쉽지 않다.”고 평했다.
1571년에 퇴계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들은 조식은 눈물을 흘리며 “같은 해에 태어나고 살기도 같은 경상도에 살면서 70년을 두고 서로 만나지 못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닌가. 이 사람이 가버렸다 하니 나도 아마 가게 될 것이다.”하였다.
이 말처럼 조식 또한 일년 뒤 세상을 떠났는데, 일설에 따르면 “내 비석에는 처사라고만 쓰라”는 이황의 유언을 들은 조식이 “퇴계가 할 벼슬은 다하고 처사라니, 평생 동안 출사하지 않은 나도 이 칭호를 감당하기 어렵거늘”이라 했다고 한다.
남명 조식은 경상우도라는 지역적 정서와 함께 그 시대 사화(士禍)의 참상을 경험하면서 경의(敬義)를 학문의 실천지표를 삼은 인물이다. 그의 실천적 학풍은 제자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어 임진왜란 의병장 출신에는 조식의 제자들이 많이 나왔다.
남명학파의 의병활동은 조식의 핵심 사상인 ‘경’과 ‘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남명정신을 대변하던 제자 정인홍이 반역으로 처형되면서 남명학파는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위기가 있을 때마다 민본(民本)을 바탕으로 한 남명 조식의 정신은 면면히 이어져 왔다. 1862년 진주에서 민란이 발발한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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